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라예보 사건 (문단 편집) === 1차, 2차 암살 시도 === 황태자 부부가 아펠 강둑[* Appel quay. 아펠 키로 발음된다.]에 도착했을 때 첫 번째 단원인 무하메드 메흐메드바시치(Muhamed Mehmedbašić)[* 이후의 인생이 기구한데 암살 시도 이후 [[탈옥]]을 실행했다가 [[몬테네그로 왕국]]에서 붙잡혔다. 1919년에 사면받았지만 1943년 [[우스타샤]]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가 암살에 실패했다. 이후 10시 10분경 두 번째 단원인 네델코 차브리노비치(Недељко Чабриновић)가 기어코 [[수류탄]]을 던졌지만 차를 맞고 튕겨 나갔다.[* 여기에 또 다른 설이 있는데, 단순히 운전수가 폭탄을 알아채고 급가속하여 빗나갈 수 있었다고 하는 설과 황태자가 '''폭탄을 도로 던져 무사할 수 있었다'''는 설이 있다.] 이때 수행원 2명과 구경꾼 10명이 다쳤다. 황당한 것은 네델코는 암살에 실패하자 자살하려고 바로 독약을 삼킨 후 옆의 강으로 뛰어들었는데 독약은 유통기한이 지난 물건이라 효과가 없었고 강은 말라서 깊이가 10센티미터밖에 되지 않았다. 덕분에 바로 생포되고 곧이어 자백했는데 나머지 단원들은 폭탄 투척이 실패하자 암살을 포기했다. 이후 시청에서 황태자는 이 암살 시도를 두고 페힘 추르치치(Fehim Čurčić) 사라예보 시장에게 이 도시는 황태자를 폭탄으로 환영하냐고 분노했지만 아내 조피가 말려서 그만두었다. 이후 영접행사가 끝나고 그와 동승한 포티오레크 총독은 빨리 군사지역으로 가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런데 '''갑자기 페르디난트 대공이 폭탄 테러로 다친 수행원의 위문을 위해서 그들이 입원한 병원에 가 봐야겠다고 주장했다.''' 당연히 주변에서는 말렸지만 황태자는 이를 강행했는데 아마 암살 시도로 인해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간의 갈등이 커지는 것을 막을 목적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기에 [[의도는 좋았다]]. 하지만 이것이 프란츠의 목숨을 앗아가고 말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